소중함
글을 쓰고 있는 이순간이 지나면 무의식의 정형화속에 소중함 고마움을 또 잊어버릴지 모른다.
십 년 전 나는 새로운 곳에 대한 호기심속에 내 인생을 이렇게까지 바꿔 놓을 줄 모른 체 알제리라는 곳으로 빠져들었다. 나도 모르게 아마도 소중함과 감사함을 내게 일깨워 주시려는 하나님의 큰 계획이 그곳에 숨어 있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파리에서 살면서 알제리를 생각할 때 그저 프랑스 식민지, 옆 동네 정도로 이곳과 비슷하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별 준비 없이 자료 검색도 안 해보고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가까우니 일주일에 한 번씩 올까?, 아님 이주에 한번? 쿠스쿠스랑 양고기 잘 먹으니 걱정 없겠지……." 라는 무사 안일한 생각으로 알제리에 도착했다.
하지만 도착과 동시에 꿈은 날아갔고 공항에서 군인들의 삼엄한 보안 검색 때문이었을까 무언가 알 수 없는 다른 공기 속에 압도된 체 앞으로의 생활이 녹녹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 나의 무지함이여…….
지금은 엄청난 발전과 외부 식당도 많아졌지만 그땐 정말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또 있다한들 너무 지저분했다.
지금은 파는 곳이 많아진 쿠스쿠스는 그때만 해도 잔치음식이어서 파는 곳은 특급호텔뿐, 하지만 아무리 배고프고 돈이 있어도 위험해 돌아다니며 맘 놓고 사먹기 힘들었다.
불과 십 년 전 이야기, 지금은 정말 천지개벽을 했다고 해야 하겠다.
그래도 감사한건 특이한 경력을 가지신 c목사님 덕에 지하교회는 있었다는 것, 그러나 난 고마운 줄 몰랐다 뭔가 우리 어렸을 적 교회들과 비교했을 때 2%부족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마져도 k목사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공백 기간이 있었을 땐 그때 그 교회라도 있었으면..., 하며 간절했었다. 예배 드리러가면서 교회위치를 현지인에게 알리지 않기 위해 기사를 물리고 직접운전해가며 예배드려야 했으며 혹, 현지 경찰이 들이닥칠까 아니면 폭탄이 터질까를 생각하며 예배를 드렸고, 대중교통수단 이용도 못하고 제 발로 자유로이 걸어 다닐 수도 없는 모든 상황이 그저 피곤하게만 생각됐다 송구영신 예배 때 수많은 검문을 받으며 새벽에 예배를 드리러 가면서 한국시간으로 하면 위험하지 않을 텐데 하며 불평도 해봤었다 휴가 때면 알제리에 머무르기 싫어 주변국을 전전하며 휴가시마다 들렀던 유럽의 교회들, 현지교회를 빌려 예배를 드리기에 시간 때가 맞지 않는 불편은 있었지만 자유로이 거리를 걸어 교회를 찾아 갈수 있는 게 좋았다
자유를 향한 탈출인가 8년간의 알제리 생활을 접고 파리로 돌아왔다.
모태 신앙이 아니었던 나는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여러 교회를 섬겼기에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구분이 없다 그냥 기독교 인 일뿐이다 파리에서는 침례교로 왔고 마침 우리교회는 파리 다른 교회들처럼 프랑스 교회에서 임대해 쓰지도 않는 교회다. 우리 교회 성전 앞에 있는 돌아온 탕자는 나와 너무 잘 맞는다. 여기는 내가 원하면 새벽 기도도 나올 수 있다 그런데 아직 간절함과 소중함이 부족해 아직 못나오고 있지만 늘 있었던 내가 누리던 일상 같다 불과 몇 년 전엔 그토록 원하던 일상이었는데 너무나 빨리 소중함을 잊는 것 갔다
이번 중동권선교사님들이 우리교회 수양관에 모이신단다. 수양관 일을 조금 도와드리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크신 계획으로 이런 장소를 여기에 마련해 놓으시는 걸까 했는데, 이곳에서 수양회등 여러 모양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을 것 같아 참 감사하다. 마치 재스민혁명 같이 급한 일이 났을 때 선교사님이 피신 오셔서 파리의 정을 느끼실 수 있었으면 좋겠고 이곳이 아프리카 선교의 전초 기지가 됐으면 한다. 언젠가 조금 더 나이 들어 아프리카선교의 생각이 있는 나에게 이곳 수양관이 고향 같이 느껴진다.
글을 쓰고 있는 이순간이 지나면 무의식의 정형화속에 소중함 고마움을 또 잊어버릴지 모른다.
십 년 전 나는 새로운 곳에 대한 호기심속에 내 인생을 이렇게까지 바꿔 놓을 줄 모른 체 알제리라는 곳으로 빠져들었다. 나도 모르게 아마도 소중함과 감사함을 내게 일깨워 주시려는 하나님의 큰 계획이 그곳에 숨어 있지 않았나 생각해본다.
파리에서 살면서 알제리를 생각할 때 그저 프랑스 식민지, 옆 동네 정도로 이곳과 비슷하겠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별 준비 없이 자료 검색도 안 해보고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가까우니 일주일에 한 번씩 올까?, 아님 이주에 한번? 쿠스쿠스랑 양고기 잘 먹으니 걱정 없겠지……." 라는 무사 안일한 생각으로 알제리에 도착했다.
하지만 도착과 동시에 꿈은 날아갔고 공항에서 군인들의 삼엄한 보안 검색 때문이었을까 무언가 알 수 없는 다른 공기 속에 압도된 체 앞으로의 생활이 녹녹치 않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 나의 무지함이여…….
지금은 엄청난 발전과 외부 식당도 많아졌지만 그땐 정말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또 있다한들 너무 지저분했다.
지금은 파는 곳이 많아진 쿠스쿠스는 그때만 해도 잔치음식이어서 파는 곳은 특급호텔뿐, 하지만 아무리 배고프고 돈이 있어도 위험해 돌아다니며 맘 놓고 사먹기 힘들었다.
불과 십 년 전 이야기, 지금은 정말 천지개벽을 했다고 해야 하겠다.
그래도 감사한건 특이한 경력을 가지신 c목사님 덕에 지하교회는 있었다는 것, 그러나 난 고마운 줄 몰랐다 뭔가 우리 어렸을 적 교회들과 비교했을 때 2%부족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마져도 k목사님이 다시 오시기까지 공백 기간이 있었을 땐 그때 그 교회라도 있었으면..., 하며 간절했었다. 예배 드리러가면서 교회위치를 현지인에게 알리지 않기 위해 기사를 물리고 직접운전해가며 예배드려야 했으며 혹, 현지 경찰이 들이닥칠까 아니면 폭탄이 터질까를 생각하며 예배를 드렸고, 대중교통수단 이용도 못하고 제 발로 자유로이 걸어 다닐 수도 없는 모든 상황이 그저 피곤하게만 생각됐다 송구영신 예배 때 수많은 검문을 받으며 새벽에 예배를 드리러 가면서 한국시간으로 하면 위험하지 않을 텐데 하며 불평도 해봤었다 휴가 때면 알제리에 머무르기 싫어 주변국을 전전하며 휴가시마다 들렀던 유럽의 교회들, 현지교회를 빌려 예배를 드리기에 시간 때가 맞지 않는 불편은 있었지만 자유로이 거리를 걸어 교회를 찾아 갈수 있는 게 좋았다
자유를 향한 탈출인가 8년간의 알제리 생활을 접고 파리로 돌아왔다.
모태 신앙이 아니었던 나는 여러 지역을 돌아다니며 여러 교회를 섬겼기에 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구분이 없다 그냥 기독교 인 일뿐이다 파리에서는 침례교로 왔고 마침 우리교회는 파리 다른 교회들처럼 프랑스 교회에서 임대해 쓰지도 않는 교회다. 우리 교회 성전 앞에 있는 돌아온 탕자는 나와 너무 잘 맞는다. 여기는 내가 원하면 새벽 기도도 나올 수 있다 그런데 아직 간절함과 소중함이 부족해 아직 못나오고 있지만 늘 있었던 내가 누리던 일상 같다 불과 몇 년 전엔 그토록 원하던 일상이었는데 너무나 빨리 소중함을 잊는 것 갔다
이번 중동권선교사님들이 우리교회 수양관에 모이신단다. 수양관 일을 조금 도와드리면서 하나님께서는 어떤 크신 계획으로 이런 장소를 여기에 마련해 놓으시는 걸까 했는데, 이곳에서 수양회등 여러 모양으로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을 것 같아 참 감사하다. 마치 재스민혁명 같이 급한 일이 났을 때 선교사님이 피신 오셔서 파리의 정을 느끼실 수 있었으면 좋겠고 이곳이 아프리카 선교의 전초 기지가 됐으면 한다. 언젠가 조금 더 나이 들어 아프리카선교의 생각이 있는 나에게 이곳 수양관이 고향 같이 느껴진다.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은혜로운 글에 감사드립니다.